마음이 약해서 채무자에게 협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권위도 없어서 어린 깡패들에게조차 두들겨 맞는 수모를 당하는 삼류 깡패 강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인 불법체류자로 강재와 위장결혼을 한 파이란의 사망소식이 전해진다. 한국 사회의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쓸쓸하게 죽어 가면서도 그에게 끝없이 감사하고 그를 홀로 사랑하던 파이란의 짧고 초라한 삶의 자취들을 더듬는 여정은 강재의 척박하고 의미 없는 삶에 변화와 구원을 가져다 주지만, 그는 결국 자신 앞에 놓인 비극적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파이란>은 하층계급의 주변부 캐릭터들에게 사실감을 부여하고 그들을 둘러싼 남루한 공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갱스터’ 장르의 사회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한편, 끝까지 만남과 짝짓기라는 ‘멜로’ 장르의 공식을 거부함으로써 가벼운 허구적 쾌락이나 모순의 손쉬운 해결에 빠져들지 않는 성취를 보여 준다. (주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