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 발라드의 1973년작인 동명의 SF소설을 영화화한 <크래쉬>는 참혹한 자동차 사고가 불러일으키는 성적 충동을 통해 에로티시즘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탐구한다. 광고회사 중역 제임스 발라드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복잡하고도 공허한 성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어느 날 제임스의 차가 헬렌 레밍턴 박사의 차와 큰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이 사고를 통해 제임스는 위험과 섹스, 그리고 죽음의 상관관계에 매혹된다. 과학자이자 사진작가인 본과 사고 희생자 가브리엘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제임스와 캐서린은 애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다. 불쾌하지만 저항할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이 작품은 자동차 기술에 대한 문명의 집착적인 애정관계와 소비 페티시즘을 논리적인 귀결로 이끌어 간다. 크로넨버그 감독의 전작인 <데드 링어>(1988)와, 윌리엄 버로우즈의 컬트소설을 영화화한 <네이키드런치>(1991)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앞의 두 작품을 한 단계 뛰어넘은 수작으로 평가될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