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는 일반적으로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 또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적은 글을 말한다고 한다. <주유소>는 그야말로 순애보겠다. 그런데 그 사랑의 정체를 말할 것 같으면 인적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주유소를 꼭 닮았다.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지키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트나 폰의 순애보에서 문과의 연결을 담은 에피소드나 행위들은 문이 바치는 사랑의 주인공 녹의 것이기도 하다. 문은 무트나 폰만이 아니라 녹에게도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또 순애보란 그 안에 전제된 순수•순결에 대한 엄격한 태도 및 이를 지켜내려는 갈망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실제 관계의 왜곡과 희생을 요구하기 쉽다. 20여 년 넘게 지속된 문의 순애는 녹에게 있어 장벽 및 검열의 다른 이름이었고, 자신의 사랑이 그렇게 제 스스로 이별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문은 눈물을 흘린다. 영화가 조감하는 주유소의 황량한 모습이 순애보의 이미지와 오버랩 된다. (채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