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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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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가의 마지막 수업> : 그녀의 걸음 소리

By 박진영

 스테판 코만다레프 감독의 신작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은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변화한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한다주인공인 블라가는 생활비 충당을 위해 이민자 대상으로 불가리아 과외 수업을 한다블라가는 성실한 노동의 값으로 얼마 전 죽은 남편의 묘를 단정할 생각이었다하지만 한 통의 전화로 그녀는 일생 모은 돈을 날리게 된다계약금이 없어 남편의 묘소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일생 모은 돈을 약탈당한 것처럼 이번에 그녀가 또 다른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은 피해자였던 중년의 여성이 가해자가 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는다.

  

 

 블라가는 굉장히 정확한 사람이다남편의 묘소 자리를 소개하는 중개인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뜻을 비슷하나 정확한 쓰임이 아닌 단어를 알맞은 단어로 교정해 줄 만큼 이성적이다반면 그녀는 불가리아 과외 수업을 할 때는 따뜻한 면모도 보인다불가리아 영주권 시험에 자신 없어 하는 수강생에게 이전에 떨어진 것은 자신과 수업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번에는 꼭 붙을 거라고 격려한다이렇게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한 통의 전화로 뒤바꾸어 버린다범죄의 수법은 고전적이나 뒤이어 전개되는 심리적 긴장감은 어마어마하다.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은 그녀가 범죄에 가담할수록 화면비율이 줄어드는 독특한 연출을 선보인다처음에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따라가면서 줄어드는 화면비율을 눈치채지 못했다영상사고인지 의심했을 정도이다결말에 가서야 그녀의 엄청난 선택으로 급속도로 줄어드는 화면비율을 보면서 사고가 아닌 연출임을 알아차렸다줄어든 화면비율 만큼 극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주인공의 모습이 더 가득 차게 되면서 영화에 대한 집중도는 올라가게 된다

  

 

 극의 중반부에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어린 피해자에게 그녀의 얼굴이 노출된다운반책의 얼굴을 봤다는 목격자가 생기자 블라가에게도 경찰은 연락하게 된다그녀는 경찰서에서 어린 피해자와 마주칠 위기에 놓이게 된다그녀는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 범죄자처럼 보이는 사람 옆에 얼굴을 감싸며 앉는다그 장면으로 그녀는 자신이 범죄자를 완벽히 자처한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이전에는 죄책감과 불안한 감정을 보였다면 이 장면 이후로 범죄에 무감각해지는 그녀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블라가는 범죄에 가담한 이후로 더 이상 상대방의 언어 문법을 지적하지도 않고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다그녀는 차가운 걸음으로 집을 나설 뿐이다. <블라가의 마지막 수업>의 영제는 <Blaga's Lessons>으로 마지막이 빠져있다개인적으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이 이 영화의 여운을 느끼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그녀의 수업 마지막이 어떤 모습인지 본다면 자본주의 폐해가 얼마나 잔혹한가를 목격할 수 있다그녀의 측면을 계속해서 비추던 카메라는 어느새 그녀의 정면을 비추며 화면은 사라지고 그녀의 차가운 걸음 소리만이 엔딩 크레딧을 채운다꼿꼿하게 걷는 그녀의 걸음 소리는 그 어떤 폭력의 소리 보다 잔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