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떠난 사람이 집안 곳곳에 남겨 놓은 흔적과 마주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온기를 얻기도 한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그러나 떠난 사람이 남겨진 자들에게 아주 강한 의미를 주었던 사람이라면 온기 대신 상실을 얻을 것이다. <미러 NO.3>의 베티(바르바라 아우어)도 그러하다. 그는 그 상실로 약을 먹을 정도로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만일 떠난 자와 아주 닮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자기 집에 온다면 어떠할까? 남은 자들이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남은 자들이 아주 닮은 사람을 떠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자기를 대한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미러 NO.3>는 음향의 대비와 배우의 열연을 통해 조심스럽게 이런 의문에 답을 제시한다.
영화는 흑과 백, 인공과 자연의 대비를 잘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하면 자동차의 굉음과 더불어 다리 위에서 강을 바라보는 여인 라우라(폴라 비어)가 등장한다. 그의 등 뒤로 강하게 질주하는 차량, 그리고 차량의 소리. 그리고 라우라는 고가도로 아래로 가서 가방을 던져둔 채 강을 바라본다. 그때 하얀색 옷의 라우라와 대비되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패들 보트에 타고 유유히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간다. 패들 보트가 라우라를 지나쳐 갈 때 순간적으로 라우라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대비하는 듯하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을 바라보고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를 바라보듯이 흑과 백은 대비를 이룬다. 베티의 집은 라우라를 둘러싸고 있었던 인공과 대비를 이루는 자연의 공간이다. 이 자연의 공간에서 라우라를 윽박지르던, 남성성으로 대변될 인공의 피조물인 자동차는 부서지고 라우라의 남자 친구도 죽는다. 라우라는 이 자동차에서 차량 뒷문의 금속판에서 비치는 모습으로 각인될 뿐이다. 라우라는 사고 후 가야 할 병원 대신에 베티의 집에서 있기를 원한다. 베티의 집과 정원, 그리고 이를 둘러싼 초원은 모두 라우라를 포근히 감싸주는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라우라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고 예감한다.
반면 베티가 라우라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떠난 자의 모습임이 조금씩 드러난다. 집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라우라를 바라보는 베티의 모습은 떠난 자를 다시 본 것 같은 놀라움이다. 그리고 제대로 작동하는 게 거의 없는 집안은 현재 베티의 가족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표정한 베티의 모습, 그의 남편과 아들이 화면 바깥에서 들리는 기계음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식사하는 모습,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등은 떠난 자가 남긴 상실의 모습이다. 세월을 느끼는 감각은 후각이라고 누가 말한 것처럼, 라우라가 만든 음식을 먹은 후부터 베티의 가족에게 상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조금씩 머물고, 대화할 때는 흥겨운 노래가 들리고, 화면 바깥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자연음이 들린다. 이렇게 영화는 인물의 비언어적 표현과 화면 바깥의 음향 대비를 통하여 등장인물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감정의 흐름의 변화 속에서 유일하게 배제되고 있는 것은 라우라의 감정이다. 베티의 가족은 그에게서 떠난 자의 흔적만을 느꼈을 뿐, 라우라라는 실제 존재를 인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라우라가 자기의 존재를 부정당한다면 그는 더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베티와 그의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베티의 가족은 이 이별에서는 상실에서 오는 우울감을 극복하려 한다. 몰래 찍은 영상을 돌려보는 것으로, 라우라의 연주회에 직접 가 보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러한 행위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자기 위안의 행위이다. 이 행위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라우라의 얼굴에 언뜻 비치는 미소는 이들의 헤어짐이 다시 만나는 인연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