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한 여주인공 연극배우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불안해한다. 연극 스태프는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듯, 차분하게 일단 숨을 천천히 쉬어보라며 그녀를 달랜다. 이것은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에서 주인공 노라의 등장씬이다. 연극 관계자들은 그녀를 달래고 무대 앞까지 그녀를 세우지만, 그녀는 또다시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녀의 이 깊은 불안은 어디에서 왔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이 불안은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온다. 노라의 어린 시절, 잘 나가던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 구스다프는 여배우들과 불륜을 일삼고,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났다.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라는 그 후로 자신이 세상과 맺는 다른 관계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맺는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다른 인간관계도 삐뚤어지기 쉽다. 노라는 갑자기 노르웨이 집에 자신과 여동생 아그네스, 자신의 어머니를 떠나 스웨덴으로 가버린 아버지를 원망하고 용서할 수가 없다. 그렇게 쉽게 타인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노라는 자신의 치부를 보여 줄 필요가 없는 유부남을 사귀면서 가볍게 연애를 하며 가정을 꾸리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 노라와 아버지 구스타프는 노라 어머니의 죽음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지난 15년간 장편 영화를 만들지 않은 구스타프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노라에게 딸을 위해 쓴 시나리오라며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출연을 제안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노라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기에 아버지가 새로 만드는 영화의 출연을 선뜻 수락할 수도 없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아내와 어린 두 명의 딸을 떠나버린 아버지 구스타프를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구스타프 역시 일곱 살 때 나치 망령에 잡아먹힌 어머니와 이별했기 때문이다. 일곱 살의 구스타프도 그 이별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구스타프가 일곱 살에 겪은 어머니와의 이별이 새로 준비하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노라가 구스타프의 영화출연을 고사하자, 노라에게 제안한 역할에 레이첼이라는 미국 스타 여배우가 물망에 오른다. 그러면서 노라와 구스타프의 갈등은 극에 치닫는다. 영화 <센티멘탈 밸류>에는 2대에 걸친 비극적 이별을 직관하고, 간직하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 바로 구스타프가 자신의 어머니와 살았고, 구스타프와 노라가 살았던 집이다. 그 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고 기록하는 매개체이다. 결국, 노라는 평생을 미워했고 원망했던 아버지를 저버릴 수 없다. 천륜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에 노라와 구스타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세 차례 번갈아 가며 오버랩되는 장면은 노라는 구스타프이고, 구스타프는 노라라는 것을 영화적으로 자명하게 보여 준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