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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온다> : 심연에서 든 햇불은 사그라지지만

By 안병만

지하 300미터. 그 깊은 지하로 빠르게 내려가는 승강기 속에서도 그들의 일상 이야기는 계속된다. 거기서부터 탄을 캐는 그들, 광부의 일상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머리에 달린 인공의 불빛만이 탄가루를 헤치며 흐릿한 빛을 비추는 곳, 누구라도 거기에 들어서면 무엇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가 깃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물 속, 심연의 느낌을 받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꿈에서라도 일하기를 꺼리는 곳인 거기에서 그들은 일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이슬이 온다>는 그 심연에서마저도 인간의 삶이 존재하고 있음을, 그들의 삶을 통해 웅변한다.

 

1970년대 소위 조국 근대화를 지향하는 시기에 노동자를 산업 역군이라며 칭송하곤 했다. 그런데 그 깊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산업 역군이 아니라 산업 전사로 이름이 붙어졌다.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명명(命名). 그들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일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럼에도 그들은 거기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가 땡전 한 푼도 보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 후에 오는 보상이 집에 보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을 그 깊은 어둠으로 내모는 것은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의 집안 형편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막장이 어떤 방법으로도 탈출하기 어려웠던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곳에서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답게 살게 해 달라고, 그 외침을 같이할 민주 노조를 건설하자고. 하지만 회사의 갑질은 을과 을의 대결, 토착민과 외지인의 대결로 치환되고, 공권력은 갑질을 못 본 척하고, 다른 대결은 내버려 둔다. 노조 건설을 와해하려는 토착민, 일명 구사대에 있었던 인물의 진정 어린 표정과 말투로 그려지는 회상은, 그 시대 상황에 실제성을 더한다. 그 인물이 진심으로 그리워한 사람, 성완희. 그는 사람의 몸으로 횃불을 만들었다. 바로 자신의 몸으로. 심연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직장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외치는 갈망의 목소리가 그 몸에 불을 붙였다. 그때를 기억하는 인물들의 서글픈 눈은, 눈물을 삼키는 인물의 목소리는 성완희의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이윽고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던 장성 광업소는 폐광이 되었다.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 몇몇은 세상을 떠나고, 현직 광부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짙은 어둠을 감싸며 내리는 흰 눈, 흘러가는 검은 탄 위로 내리는 흰 눈이 그들의 사라짐을 포근하게 안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눈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든 횃불은 사그라들었지만, 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에게는 살아 숨쉬기를, 아니 살아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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