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철들 무렵> : 놀이로만 견딜 수 있는 호모루덴스

By 임혜정

 정승오 감독은 첫 번째 장편 영화 <이장>에서 가부장제를 씹고 뜯고 맛보고 장사(葬事)지냈다. 반가운 두 번째 작품 <철들 무렵>에서는 가족을 소재로 더욱 확장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장>이 남아선호사상의 어이없음을 보여주었다면 <철들 무렵>은 가족이라서 맞닥뜨리는 돌봄 노동을 화두로 삼는다. 

 

 단역 배우로 일하면서 다른 작품의 오디션을 다니는 정미는 휴대폰 연락처에 아버지 철택을 ‘택이’라고 저장해 놓았다. 아버지는 출신학교와 학과가 인쇄된 작아진 옷을 입고 있다. 정미의 방문은 역할극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철들지 못했거나 철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미는 철택의 병원비가 필요하게 되자 20년째 별거 중인 엄마 현숙과 큰아버지에게 연락한다. 현숙의 다섯 남매는 구순을 맞은 노모의 거취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현숙은 연금도 없는 정미의 불확실한 미래를 지적하면서 아빠 안 좋은 것만 닮은 ‘동족’이라고 잔소리한다. 

 

 정미가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일들은 마음과 몸이 건강한 사람도 지치고 힘든 일이다. 인간의 여러 기관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분비물을 처리해야 하며, 밤에 잠을 잘 수도 없다. 돌봄이란 두 사람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감정교류와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우고 연민하고 미안해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동족’은 허구의 이야기와 그 힘을 보여준다. 병실에서 연기를 하던 정미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이 필요하고, 얼굴도 안 보이는 역할을 하는 딸을 배우로 지지하는 철택은 말기 암에 맞서 살고 싶어 한다. 이성적 인간 사피엔스도 도구를 만드는 호모파베르도 인류를 살아남게 했지만, 이 순간은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가 생존에 필요하다. 정미와 철택의 모습은 영화의 효용을 묻는 질문과도 이어질 수 있다.

 

 영화 이전의 놀이는 이야기였다. 구전되던 서사시는 활자가 만들어진 후 널리 전해졌다. 영화는 현숙의 어머니 노옥남 여사의 나레이션이 이어지면서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진다. 나레이션의 내용은 박완서 작가님이 자전적으로 집필한 책들이다. 3장의 소제목 ‘상처 속에 박힌 말뚝’은 『엄마의 말뚝』의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시대를 목격하며 언젠가는 글을 쓰리라는 예감을 했다고 기억해낸다. 1931년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내용을 증언하듯 써 내려간 글은 동시대를 살아온 노옥남 여사의 삶과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많다. 과거 재현 장면의 영상은 출판된 글과 개인의 경험을 마법처럼 혼합하여 이 가족이 만들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공적인 경험으로 승화하는 순간을 느끼게 해준다. 

 

 <이장>에서 큰 누나의 어린 아들 동민은 다섯 남매의 소동을 같이 경험하지만, 혼자만의 작은 여행으로 성장을 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큰아버지의 손자 역시 ‘동민적 관찰자 시점’으로 영화 속에 등장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 대가족이 희귀해지고 가족이라서 겪는 돌봄이 복지나 외주의 이름으로 희미해졌을 때 동민은 어떤 가족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회고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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