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김진유 감독의 <흐르는 여정> (2025)는 죽은 자와 남은 자의 애도에 관한 영화이다. 감독은 애도의 과정을 고상하고 세심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시각적 영상이 차지하고 남은 여백의 빈자리는 음악이 채워준다.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는 애도의 장면이 분노, 우울, 상실이라는 격한 과정으로 얼룩지는 것과 달리 영화 속 애도는 차분하게 절제되어 있다. 감독이 이토록 아름다울 만큼 가공된 세계를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춘희(김혜옥)는 주택을 정리하고 병원이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한다. 그러나 1층 베란다 앞 나무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를 집에 들일 수 없어 난감해한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민준(저스틴 민)이 자신의 15층 집 거실에 놓으라는 엉뚱한 제안을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이웃으로서 서로 왕래하며 음식을 나눠 먹고 음악을 이야기하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피아니스트인 민준의 제자(박대호)까지 더해져 가족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춘희, 민준, 상찬을 묶는 공통분모는 ‘그리움’이다. 영화의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세 사람의 관계의 표면과 여백에 자리하지만, 음악은 모두 부재한 이들에 대한 애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춘희는 사별한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가 남긴 그랜드 피아노와 구형 각 그랜저를 매일매일 닦는다. 죽은 것에만 먼지가 쌓인다며, 사별한 남편의 혼이라도 붙잡으려는 듯이 부단히 애를 쓴다. 독일에서 생모를 찾으러 한국에 체류 중인 민준은 생모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깊어 음악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외톨이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상찬은 배달 일과 청소를 하며 피아노를 계속 해야할 지 말지를 고민 중이다.
춘희는 민준이 생모를 위해 절에서 제를 모시는 것을 돕고, 상찬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삶의 애착을 잠시 되찾는다. 수화 봉사를 하다가 남편을 만났던 춘희는 타인을 돕는 일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런 아내를 위해 들리지 않는 귀 대신 피아노의 파동을 느끼며 만든 곡을 선사한 남편은 지금 여기에 없다. 하지만, 민준과 상찬이 남편의 빈자리를 음악으로 채워준다. 남편을 애도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춘희의 일상은 새로운 인연과 따스함으로 가득해진다.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석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피아노를 그만두려는 상찬에게 춘희가 질문을 던진다. “상찬이는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 거니?” 아무 말도 못 하고 먹먹해지는 상찬을 통해 예술에 대한 갈망과 삶을 향한 애착을 다시 묻게 한다. 상찬을 포함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관객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은 돌멩이를 맞은 물 위의 파장처럼 우리 안에서 찡하게 퍼져 나간다.
이 장면은 김진유 감독이 왜 영화를 끝까지 우아하고 절제된 톤으로 유지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인물들의 고통을 과장하기보다, 삶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하고자 한다. 비빌 곳 없는 상찬의 세대에 손을 내미는 춘희의 세대, 그 다리를 놓아주는 민준의 세대. 이 순환은 하나의 ‘흐르는 여정’이 된다.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상실 위에서 다시 이어진다는 사실을, 감독은 변치 않는 예술 언어인 음악으로 전하려 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