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켄달 월튼의 '믿는 체하기' 이론은 우리가 허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작품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믿는 셈 침으로써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함께 상상하는 태도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허구는 흔히 말하는 '비존재'와는 다르기에 영화와의 온전한 접점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겠으나, 영화 <우아한 시체>의 대담한 설정에 입장하기 위한 태도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아한 시체>의 서사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 민주(이유하)는 ‘벤’과 사랑에 빠진다. 둘. 유하(오규희)는 쌍둥이 '유진'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화법은 의뭉스럽다. 영화는 사랑의 대상을 보여주지 않거나 서로 다른 곳에 동시에 존재하게 한다. 이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언급한 태도다. 그렇게 영화의 설정을 믿는 셈 치고 이야기를 살필 때 비로소 다음 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이 뒤섞이며 그려지는 이야기처럼 각자가 주장하는 이미지와 서사를 주워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그건 영화의 자양분이 된 소설 속 ‘존재는 어떻게 증명되는가’라는 물음을 <우아한 시체>에 적용하고자 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렇게 영화가 존재를 증명하는 '믿음'을 흔드는 동안 우리는 허구 안에서 실체를 건져 올리는 방식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영화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침범에 대해서다. 오프닝에서 화면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아닌 '귀'다. 뒤이어 귀에 매달린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소리가 내부로 흘러드는 공간인 동시에 외부적인 물성을 지닌 것임을 떠올린다. 두 공간이 이어져 있다는 점은 그것이 침범으로부터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취약성은 민주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침범은 주로 일방적인 발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건 너무 많은 말이기도, 원치 않는 선물이기도, 요구한 적 없는 변명이기도 하다. 자기표현의 수단이자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말은 더없이 이기적이다. 민주의 전 연인(손준영)과 상철(정승민)이 그러했듯, 매미를 삼키기라도 한 듯 시끄러운 '이해에 대한 요구'는 민주에게 사랑이 폭력의 형태로 다가오는 이유가 된다. 그런 민주에게 벤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 투명하고 잠잠한 연인. 너무 많은 것을 묻지도,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지도 않는 그는 민주에게 침범이 배제된 안전한 연인이이다.
벤의 등장과 함께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다'라고 생각한 것들이 계속해서 어긋나는 지점이다. 가시에 둘러싸인 밤송이가 열리고 알맹이가 드러난다. 투명한 젤리는 다른 감각을 연다. 우리가 민주라고 불렀던 이의 본래 이름이 들려온다. 이러한 영화의 시선은 보고 듣는 행위,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믿음의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실체에 대한 물음은 믿음의 태도와 연결된다. 민주는 손가락을 다친 이유를 꺼내어 말하지 않는 이다. 그것이 폭력이라는 내밀한 사건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상의 진위를 의심하는 친구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아내를 불신하고 감시라는 폭력을 이어가는 그의 태도는 비가시성 위에 쌓아 올려진 민주-벤의 투명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그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정말 견고한 성질이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