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데뷔작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징 감독의 <보태니스트>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소년의 성장을 서정적인 풍광 속에 담아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마치 오랜 구전을 읊어주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적인 설화를 전한다. 새벽녘, 어둠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 홀연히 등장하는 노인은 주인공 아르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카자흐스탄과 맞닿은 중국 신장 북부의 광활한 초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토속적이고 신화적인 정서를 강화하며 영화에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시간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양치기를 하며 틈틈이 식물을 채집하고 기록하는 아르신은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는 듯한 인물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식물의 생김새와 특징을 섬세하게 기록하는 그의 행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한때 자신에게 '식물학자'라는 별명을 남기고 떠난 예르켄 삼촌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르신은 삼촌의 유산에 묶여,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르신이 믿고 따르던 예르켄 삼촌이 도시로 떠난 뒤, 그 빈자리는 또 다른 삼촌, 즉 오랜 관습에 따라 할머니의 양아들이 된 형이 채운다. 그러나 그는 예르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아르신에게 모범이 되기는커녕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도시 상하이에서의 실패와 사고를 피해 급히 고향으로 도망쳐 온 그는, 초원을 그리워하는 대신 오히려 화려한 도시를 끊임없이 동경한다. 술주정과 허세로 일상을 채우고, 양 떼 돌보기에도 무관심하며, 언제든 다시 고향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감독은 이러한 대조적 인물을 통해, 한적하고 고립된 신장 지역과 화려하고 어지러운 대도시, 이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유목민과 도시 시민의 간극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단순히 인물의 내면을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매료시킨다. 작중 등장하는 말이 말을 하는 장면, 동틀 무렵 노을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식물, 달빛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물 등은 아르신의 내면 풍경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는 마치 현실의 초원을 신화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며, 소년의 성장과 고뇌를 더욱 신비롭고 깊이 있게 전달한다.
결국 <보태니스트>는 떠나고 남겨지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 소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아르신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르켄 삼촌, 진학을 위해 대도시로 떠나야 하는 한족 소녀 메이유, 때가 되었다며 마치 환상처럼 어느날 말을 타고 가버리는 절친한 친구까지. 아르신과 어울렸던 이들은 이제 같은 공간에 남아있지 않는다. 하지만 아르신은 서로를 좋아하는 듯 작중에서 묘사된 메이유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기찻길을 알아보기도 하며, 또래 소년과 다툼 때문에 그토록 아끼던 식물 기록 노트가 손상된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장면을 보면 그에게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만 머물 의향이 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유목민의 삶과 기록하는 행위, 그리고 스스로를 묶어두는 듯했던 별명마저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잠시 멈춰 서서, 각자의 시간 속에 맴돌았던 기억과 삶의 흔적들을 되새겨보도록 초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