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철들 무렵>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놓여있는 상황들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법한 갈등 정도로 인식될 수 있다. 흉부 암 4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 철택과, 연기자를 꿈꾸지만 보조 출연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다가 이제는 간병까지 하게 된 딸 정미,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은퇴 생활을 하고 싶지만, 구순이 된 어머니를 모시길 압박하는 형제들에게 치이는 현숙의 이야기는 이렇게 텍스트로 이 작품의 개요를 구술했을 때는 다른 특별함이 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의 일상 그 자체로 보인다.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작품이 가진 해학적 태도다.
리뷰를 남기기
위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유머의 비평적 가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극장에서 한참 웃음을 터트리다가 또 다시 슬픔이 찾아왔고 또 웃음이 찾아왔다가 다시 섬뜩함이
느껴지고 또 다시 웃음이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생각해봤다. 떠오르는 표현은 집요하고 지독한 솔직함이다.
웃겼다가, 울렸다가, 웃겼다가, 섬뜩하게
느껴졌다가, 다시 웃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정승오 감독의 시나리오 집필 방식에 대해 생각해봤다. 희비극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사건에 대한 다면적 포착으로도 볼 수 있다. 유머는
절망의 끝에서도 비극을 잠시 유예하고 사안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을 낭독하는
외할머니 옥남의 목소리를 통해, 모든 개인적 갈등들의 실마리를 한국 사회 내부에 대한 관통으로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보듬고 있었다.
하지만 유머란
어떤 냉정한 자기 비판이나 사회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드러내거나 사안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위해 유머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통찰은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뒤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부가적인 자기 인식에 해당한다. 유머를 만들어낸 창작자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유머러스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렇게 바라보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바탕 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도 유머를 만드는
그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승화다. 이 영화는 승화로 가득
차 있다. 승화는 부정적인 자기 인식과 정서를 억압하지 않고 직면하여 표출한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감정, 충동, 욕망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행동과 창조로 전환시킨다. 깊고 어두운
감정을 직면하고 사회적 가치를 띤 형태로 전환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승화다. 승화는 승화를 전달받은
사람에게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에 앞서 승화를 실현시킨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의 희비극이 쉴 새 없이 교차되는 순간에 열심히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창작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실제로 GV를 통해 감독은 부모님의 병 간호를 하게 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창작자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고통을 잘게 씹어 삼킨 것이다. 감독은 집요하게 자신을 파고드는 해학의 승화를 통해 영화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영화 속 인물들은 해학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