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부산에 살지 않는 타지인이지만 북항친수공원에서 산책하는 걸 즐긴다.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바람과 풀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데다 바다까지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이 공원에 나타나 크게 화제가 된 흑상어를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 상어가 여기에서 장기 체류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명확하게 답변하기 어렵다. 상어는 지금도 인간에게 무언가 전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걸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의 세계는 분명히 살아 있고 인간에게 자기 목소리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린다. 카메라는 때로 가깝게 때로 떨어져서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친수공원 상어의 말을 우리가 알아듣기 어렵듯이 이 세계의 목소리는 독해하기 쉽지 않다. 주인공 닌은 얼마 전부터 병세가 나빠진 모친을 간병하고 있는 중년 남자다. 부인과 두 자녀와는 어떤 연유로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데 카메라는 이걸 처음부터 소상하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즉 영화는 자연과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 세계도 인간도 쉽게 자신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오래 귀를 기울인다. 뚜렷한 사건은 거의 없지만 이상하게도 다음 장면이 기다려진다. 이 영화에서 기대를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가 아니라 세계가 다음에는 어떤 표정과 소리를 들려줄지 모른다는 감각이다.
다시 말해 <조용히 귀 기울이면>이 집중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바로 이 살아있는 세계다. 특히 세계가 읊조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고요한 숲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 여러 동물의 울음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인간도 이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여러 소리를 내는데 그 대부분은 노동의 소리로 채워진다. 과일을 깎고 마당의 흙을 퍼내고 짚 더미를 정리한다. 그 와중에 대화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이벤트다. 거의 끝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인 ‘언어’가 무엇인지 이 무심한 카메라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모친의 병세가 걱정된 아들이 어머니에게 묻는다. “요즘 좀 어떠세요?” 대답에 잠시 뜸을 들이던 모친은 “밤에 자꾸 깨는 데 더 잠들기가 어렵구나.”라고 답한다. 아들은 여기에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대신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모자의 대화는 이 침묵으로 그 울림이 더 커진다. 아들의 심경이 어떤지 설명하지 않지만 이보다 더 절절하게 그 걱정스러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
연극을 공연하는 장면에서 오히려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대사로 등장한다. ‘그리움’, ‘애절함’, ‘염원’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조용히 귀 기울이면>에서 이 단어들은 그저 소리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식사, 아버지와 아들의 실없는 대화, 부인의 ‘이제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그만 오면 안 될까?’와 같은 조심스러운 물음에 녹아 있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에서 ‘살아 있다’는 ‘미래를 알 수 없다’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아들은 운명한 모친의 발을 쓰다듬지만 이제 어머니가 아닌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 물체에는 어떠한 미동도 어떠한 감촉도 느낄 수 없다. 익숙한 풍경 속 작은 변화와 미세한 움직임을 대개는 무심히 지나치기 마련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깨닫는 건 늘 조금 늦은 뒤다. 인간은 세계와 직접 대화할 수 없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신호를 끝내 언어로 옮기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무가 건네는 이야기와 바위가 전하는 감촉을 우리는 언제쯤 알아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