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우리 사회가 최대한 올바르게 돌아가도록 설정된 윤리이념은 결국 사람이 그 가치를 체감하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념이 모두를 끈끈하게 하나로 묶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쌓여가는 아비투스가 저마다 다른 판단의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안녕과 만인의 행복을 위해 합의된 사회규율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어느 한 집단의 아비투스가 보편의 얼굴을 쓰고 법과 규율, 관습 따위를 이루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개인의 아비투스는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규율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과정이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선민의식을 전제로 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부르디외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상징폭력이다.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피오르>는 이러한 충돌을 노르웨이의 외딴 피오르 마을로 옮겨온다. 신앙심 깊은 이민자 가족이 마을에 자리를 잡지만, 학교에 간 딸아이의 몸에서 멍 자국이 발견되면서 이들의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는 아동에 대한 교육관, 그리고 그 교육 방식에 누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 앞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노르웨이인들의 생활 기저에 깔려 있는 ‘얀테의 법칙’이 놓인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이웃을 존중하고 겸손하라는 같은 지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가정인 주인공 가족도, 그들을 심판하는 노르웨이 사회도 그 지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들이 과연 누군가를 훈육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훈육 방식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각자가 붙들고 있는 이상에 비추어 보자면 어느 쪽도 선민의식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 그럼에도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서로를 내려다보며 가르치려드는 모습은 씁쓸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영화는 부모의 사랑, 국가의 보호, 타인에 대한 평가라는 명분 뒤에 우월의식이 내재된 오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에게 묻고 있다.
여기서 질문의 대상을 영화 자체로 바꿔보자면, 영화 역시 폭력의 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법하다. 영화라는 감독만의 무대에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가 들어가고, 그 행위 속에 영화적 연출들이 덧입혀진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지 고르는 순간, 감독의 손에 든 카메라는 이미 하나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판단을 피할 수 없는 매체라면, 감독은 그 판단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쪽을 택한다. 관조적인 카메라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이민자 가족과 그를 둘러싼 노르웨이 사회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채, 인물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갈등을 담담하게 비추어 낸다.
이러한 연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의혹의 중심에 놓인 체벌을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는 체벌의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관객에게는 아이의 몸에 남은 흔적과 그것을 두고 엇갈리는 말들만이 주어진다. 설령 같은 장면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관객은 저마다의 시선에 따라 그것을 훈육으로도, 폭력으로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감독은 그 장면을 화면 밖에 둠으로써 관객이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근거를 거둬들이고, 관객을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불완전한 정보 앞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순간, 관객 역시 또 하나의 선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피오르>는 그저 카메라로 비추기만 할 뿐, 그 어떠한 메시지도 던지지 않는 것인가? 담담한 시선 속에서도 감독은 규칙과 관습에 오염되지 않은 배려를 기꺼이 내어주는 인물을 대조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나름의 해답을 더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타심이 <피오르>가 내비치는 논쟁거리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만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 왔으므로, 감독이 내놓은 해답을 무난한 타협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이 여전히 논쟁을 낳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자면, 그 관습적인 메시지조차 아직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이야기를 곱씹어봐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