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상영관을 압도하는 트랙터 소리.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소리의 크기와 역비례하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어디나 과자 ‘짱구’처럼 생긴 크고 흰 뭉치가 툭툭 놓여 있다. 볏짚을 기계로 말아둔 ‘곤포 사일리지’다. 이 기계나, 운전하는 사람을 ‘베일러’라 부른다. 소 먹이가 될 건초가 영양분을 품고 있으려면 적당한 수분이 필요하기에, 베일러 작업은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어둠에 묻힌 시골길에서 앞뒤를 비추는 트랙터의 헤드라이트는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일반 차보다 몇 배는 밝고 넓어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 정적을 깨는 그 빛과 소리, 그리고 웅장한 움직임에는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어떤 울림이 있다.
은주(김슬기)는 8년간 이어온 회사 생활을 청산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고층, 집 안 구조 대신 창가에 앉아 있는 은주의 모습만을 화면에 담는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 임신을 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담담히 전할 뿐이다. 표정 변화 없이 통화를 마친 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에서, 이 영화 <베일러>가 관객을 화면에 몰입시키기 위해 얼마나 정적이고 조용한 호흡을 택했는지 가늠하게 된다.
은주는 옛 애인으로 보이는 창호(우지현)와 통화를 한다. 창호는 자신의 농장에서 노임을 넉넉히 줄 테니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권한다. 포터를 몰아야 하기에 1종 보통 면허와 스틱 운전 능력이 필수 조건이다. 그렇게 은주는 창호가 있는 정읍의 축사로 향한다. 소를 키우는 곳이기에 먹이를 주는 일도 하지만, 핵심은 소가 좋아하는 건초를 뭉치는 베일러 작업이다. 은주는 주로 남성들이 일하는 그곳에서 임시직 농장 노동자로 삶의 한 단계를 지나게 된다.
이제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은주의 묵묵한 베일러 작업이다. 영화 <베일러>는 은주가 축사 농장에서 보낼 나날들에 대부분의 앵글을 할애한다. 가끔씩 있는 회식, 일에 관한 소소한 대화, 그리고 제주도로 와서 쉬라던 선배의 목소리가 잠시 쉼표가 되어줄 뿐이다. 몇가지 죽음을 만나거나 트랙터에 갈려 죽은 사람 이야길 듣지만, 시작에서 무표정 처럼 은주는 지나는 듯 흘려버린다. 감정을 표출하는 유일한 도구는 트랙터의 구동음이고 이 자체가 사운드이자 음악이다. 그렇기에 몇 번 등장하지 않는 다른 음향 효과는 오히려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는 트랙터의 움직임에 밀도 있게 집중한다. 은주 혼자 작업할 때도 있지만, 여러 대가 합을 맞춰 움직일 때면 마치 트랙터의 군무가 펼쳐지는 듯하다. 줄을 맞춰 팔을 벌리고 오므리며, 하늘과 땅을 향해 반짝이는 지푸라기를 던지고 큰 소리로 노래하듯 움직인다. 사람의 노동과 기계의 움직임이 어우러져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감독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영화에는 인물 간의 극적인 갈등이나 다툼이 거의 없다. 그저 노동과 휴식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묵묵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거친 말이 오가고 생리현상조차 편히 해결하기 힘든 남성 중심의 현장 속 여성 은주. 밤낮없이 트랙터와 밤을 지새우는 은주의 표정은 고된 일을 견디는 노동자라기보다, 일념으로 정진하는 수행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추수가 끝난 밤의 들녘, 동작을 멈춘 트랙터는 어둠을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며, 멀리 지평선마저 품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은주가 휴식을 취하며 지평선 너머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는 순간, 그 빛은 마치 은주와 트랙터가 함께 나누는 묵시적 교감처럼 다가온다. 화려한 풍광은 아닐지라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찰나는 장엄하고 가슴 버거운 감탄을 자아낸다. 작업 중 위로 튀어 오르는 지푸라기 조각들은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밤하늘에 다양한 형상을 그려낸다. 어릴적 손을 높이 들며 환호하던 순간이나, 바람에 휘날리는 눈발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과 후반부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영화 <베일러>에서 가장 유일하고도 아름다운 환상성을 부여하는 장면이다.
귀를 울리는 거친 기계음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지극히 조용하고 깊은 영화 <베일러>에는 읽어낼 여백이 참 많다.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그 살아가는 것에 이것저것 이유를 붙이는 것조차 군더더기처럼 느껴진다. <베일러>는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갈 것을 권하는 듯하다. 삶이라는 궤적 속에서 수행과 깨달음을 건네는, 한 편의 그림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