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목록에서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특별전: 광기의 걸작, 전율의 기대작 12+1>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영화제의 깊이와 무게도 달라졌음을 체감하게 한다. 그래픽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이제 생성형 인공지능은 정교한 이미지를 빠르게 만들고, 익숙한 성공 공식을 재현하는 데까지 능숙해졌다. 이러한 시대에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전한 정형성에서 벗어나 실험과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던 멋진 과거의 작품들과 그 정신을 이어나갈 신작을 모은 이번 특별전에서 그 답의 힌트를 얻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약 20년의 간격을 둔 <숨바꼭질>(2004)과 <시라누이>(2026) 두 단편을 함께 배치한 묶음 상영은 근사한 큐레이션이다. 두 작품은 각각 호러와 드라마라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인간 창작의 가치를 보여준다.
모리타 슈헤이 감독의 <숨바꼭질>은 해가 지면 요괴가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버려진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사라진 여동생을 찾으려는 소년은 금기의 놀이 ‘오토코요의 숨바꼭질’에 뛰어든다. 구룡성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물의 꼭대기에서 지하 끝까지 하강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관객을 단숨에 기괴한 디스토피아 세계관 속으로 끌어들인다. 붉고 푸른 네온, 무표정한 전통 가면, 거친 타악기와 날카로운 마찰음 등 시각적, 청각적 요소가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동생을 구하려던 소년은 놀이에서 살아남아 결국 새로운 술래가 되면서 자신을 삼키는 공포의 질서에 편입된다. 당시의 3D 컴퓨터 그래픽과 셀 셰이딩 기법을 결합한 화면은 입체적인 공간에 단색의 면과 굵은 윤곽선을 입혀 손으로 그린 듯한 질감을 구현한다. 카메라는 복잡한 골목을 빠르게 누비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시점과 속도로 공포를 강화한다. 현실의 물리적 제약을 벗어나 추격당하는 감각을 구현해내는 데에 3D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한편, 여전히 2D의 질감으로 구현한 캐릭터를 통해 전통적인 수작업의 손맛과 아우라를 유지한다. 외부의 복잡하고 거대한 공포와 그 속에서 무력한 아이의 대비가 작화 기법의 차이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가타노사카 료 감독의 <시라누이>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학대와 방임 속에 살아가는 소년 미나토의 이야기다. 아동 보호시설로 이동할 날을 기다리는 소년은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바다 너머의 불빛 '시라누이'에 희망을 건다. 미나토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원을 빌지만,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커질수록 소원은 저주로 변해간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극도의 사실주의적 묘사와 깊고 차가운 푸른색의 바다로 담아내는 한편, 위로와 구원의 존재인 시라누이의 불빛은 지극히 환상적이고 아득하게 그려 내며 구원이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면적인 화면에서도 인물과 풍경의 배치, 빛의 묘사만으로 감정의 온도가 선명하게 표현된다. 특히 감독이 상당수의 원화를 직접 손으로 그렸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감독은 신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직접 관찰해 원화에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체 감각을 직접 투영한 수작업 과정은 필연적으로 불균질한 속도나 찰나의 미세한 떨림과 같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순을 그림에 남긴다. 인공지능이 미처 계산해 낼 수 없는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감성을 표현해 내는 지점이다.
<숨바꼭질>의 어둠은 외부의 공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면, <시라누이>의 어둠은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 안에서 자라난다. <숨바꼭질>은 디지털 기술로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공포의 공간을 창조해내고, <시라누이>는 손으로 그린 움직임과 절제된 화면으로 한 인간의 마음을 심연까지 파고든다. 서로 다른 기법을 택한 두 작품은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작품의 감각과 관객의 경험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두의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에 단순히 인간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예상보다 더 빨리 실사에 가까운 빛이나 질감, 움직임을 구현해내는 수준으로 발달할 것이다. 결국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완벽한 작화나 신기술의 활용 그 자체가 아니라, 창작자가 무엇을 위해 그것을 활용하고 또 무엇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넘어서는지에 달려 있다. '광기의 <숨바꼭질>'과 '전율의 <시라누이>'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