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베일러> : 들판에서 배설하기

By 배혜경

​삶에 방향이 있다면, 삶의 방향에서 잠시 놓여난 은주의 한달 살기를 정읍의 들녘이 전개한다. 논뷰 밭뷰가 선호되는 이유를 알 정도로 정읍 들녘의 풍경이 그 자체로 주인공이다. 새벽 안개 걷히는 미명이나 해거름에 붉게 타오르는 하늘, 인물들을 비추는 눈부신 역광,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의 광막함에서 무심하고 냉정한 자연의 위로가 전해진다. 가만가만 그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을 포함한 생물들이 목숨을 이어가는 일상 행위가 나란히 있음이 느껴진다. 


영화 <베일러>는 우리에게 무관심한 자연에 사람이 어떻게 스며드는지 마치 감독의 말투처럼 목소리를 낮춰 느리고 적게 말한다. 오세현 감독은 GV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정읍의 풍경을 화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며, 먹는 행위보다 싸는 행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다른 답변을 할 때는 웅얼거리듯 잘 들리지 않았는데 이 말을 할 때 목소리는 또렷하고 두 음절이 명확했다. 배설은 살아 있다는 증거 중의 증거, 문명인에게는 먹는 일보다 더 엄중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베일러>는 보통 여자 은주가 생리 현상을 자연에서 어떻게 해결하며 삶에 자연에 적응해 가는지, 자연에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기까지의 이야기다. 팀원 남자가 식당 앞 담벼락에서 배설할 때 그리는 호를 카메라는 크게 잡는 반면, 은주의 세 번에 걸친 배설 행위 동안 그것은 철저히 가려진다.​ 그래도 은주가 들판에서 중장비를 몰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방법과 태도에 점점 변화가 보인다. 타인의 시선에서 상처받아 왔음 직한 은주의 눈빛이 첫 배설의 불편함에서 세 번째는 흐뭇함과 만족감으로 바뀌어 있다. 


은주가 어떤 갈등을 겪었을지 추측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영화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창호와의 관계도 짐작되는 게 있을 뿐, 지금은 다 가라앉은 감정의 지꺼기가 우정으로 남은 정도로 보인다. 도시에서 8년만에 직장을 그만 두고 임신을 한 채 창호의 축사에 온 은주는 하루하루 몸을 움직이는 일에 거부감 없이 달려든다. 은주의 내면에 일렁이는 감정을 무뚝뚝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마치 자연의 흐름이 그러하듯 쉽사리 어떤 결론에 도달하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공룡알이라고도 불리는 곤포 사일리지, 혹은 베일을 은주는 마시멜로로 부르고 싶어 한다. 베일러를 몰며 거대한 마시멜로를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은주는 아직은 서툴지만 아주 서툴지도 않게 천천히 기계와 한몸이 되어 간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기계는 이 영화에서 두 번째 주인공이다. 특히 어둑발 내린 들판을 두 눈 크게 뜨고 누비는 기계는 위엄에 더해 우아함마저 느껴진다. 지푸라기가 공중에 날리며 이러저러한 사람의 일이 난분분한 장면은 담담한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이다. 진눈깨비처럼 공중에 흩날리는 짚을 긁어모아 단단히 뭉치는 일에도 제각각의 도구가 필요하다. 이 모든 풍경을 멀리서 한눈에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소에게 밥을 주고 커다란 기계를 운전하고 함께 일하는 결이 다른 사람들과 불편하지만 영리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서사의 대부분인 <베일러>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 아니라 일과 노동, 생산의 현장으로서 이곳에는 탄생과 죽음의 분명한 진리가 산재한다. 여자의 몸에 일어나는 대사건, 생명을 품고 있는 미혼의 은주에게 꼬물대는 갓난 고양이 새끼들, 로드킬당한 강아지 토토, 혼자 고투하며 출산 중인 소 그리고 8개월이 지나면 잘 안 죽는다던 소가 죽어버렸다는 전갈과 급작스러운 기계 사고 소식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을 몰고 온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고유한 감정이다. 영화는 생과 멸 모두가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는 은주의 야무지고 잔잔한 피부 아래 고요히 응축되는 그 모든 감정이 은주의 입을 통해 두 번의 자장가로 들려오고, 자장가는 오늘 하루도 잘 보낸 자연에게 휴식의 노래가 된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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