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우리는 종종 보고듣는 것을 곧 사실이라 믿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별개의 개념이다. <에브리타임>은 한참 대화 중인 제시와 룩스의 음성을 두고 건물의 전경을 비춘다. 관객은 그것이 제시가 바라보는 풍경이라 착각하게 되지만 제시는 사실 그 풍경 속(건물의 옥상)에 있다. 영화는 같은 눈속임을 반복한다. 제시의 음성 위로 건물이 보이고 누군가가 그 풍경 안에서 추락한다. 관객은 두 번 속지 않는다. 이제는 그 사람이 제시임을 안다. 비극적이게도 그렇다.
영화는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다. 그의 어머니(엘라)는 묘지 앞에서 일상의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쁘고, 동생(멜리)은 자주 농담을 건네고 장난스럽게 굴며, 애인(룩스)은 새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 남들 눈에는 다 해결된 듯 보이겠지만 사실 괜찮을 리 없지 않은가. 멜리는 죽은 몸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열변을 토하고, 룩스는 유가족을 모욕하는 친구를 저도 모르게 공격한다. 멜리는 제시와 주고받았던 문자를 붙잡고 있고, 룩스는 제시의 침대에 누워 아이처럼 엉엉 운다. 셋은 수영을 한다. 멜리는 어린이용 풀장에서, 룩스는 호수에서, 엘라는 바다(바닷물이 침범하는 수영장)에서 수영한다. 물의 양과 깊이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짐작된다. 아이들과 달리 거대한 바다를 마주 보는 엘라의 슬픔은 사사로운 행동들로는 표현되지도 못한다.
셋은 제시가 남긴 것을 더듬는다. 그녀가 하던 게임을, 그녀와 나눈 문자 메시지를, 그녀를 담은 사진과 영상을, 그녀의 시선을,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엘라는 딸이 떠난 날의 일부를 재현한다. 룩스를 데리고 숲으로 가 약을 하고, 딸과 똑같은 곳의 풍경에 매료된다. 영화는 그 행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들이 떠난 사람을 반추하고 추도하기를 기다린다.
<에브리타임>은 보이고 들리는 것을 뒤섞는다. 극의 초반, 불 꺼진 집에서 작게 게임 음악이 들린다. 소리의 근원은 멜리가 쥐고 잠든 게임기 속이다. 곧이어 화면이 인게임의 가상 이미지로 전환되고, 음악은 영화 밖으로 이동해 배경음악이 된다. 제시는 건물 옥상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었다. 동이 트는 이미지는 영화 화면(영화 속 실제)으로, 휴대폰 촬영 사진으로, 녹화된 비디오로, 게임 이미지로, 여러 형태를 거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드론 하나가 엘라 주변을 맴돌고, 드론이 촬영한 듯한 영상이 아무렇게나 재생된다. 그러니까 영화 내내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경계가 자꾸만 흐려진다.
영화는 셋을 비일상적인 장소(테네리페)로 데려가고, 여기서부터 이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비틀기 시작한다. 현실에 허구를 섞고 실제에 기억을 중첩시킨다.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면 제시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시간을 붙잡아둘 수도 있는 거니까. 동이 트는 것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이들은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물의 한가운데지만 더 이상 흠뻑 젖지 않은 채다. 영화는 우리 세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에브리타임>이 태양을 멈추고 우리에게 시간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