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극장에 두고 온 것들> :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By 이병선

도경은 대학 시절 함께 영화를 찍었던 민우를 우연히 만나 같은 동아리였던 현진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듣는다. 그 시절 찍은 기록 영상을 보던 도경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현진에 사로잡힌다. 이후 도경은 현진의 작품을 찾아 전국의 오래된 극장을 헤맨다. 도경은 왜 기어코 현진을, 그의 작품을 기억하려는 걸까? 영화 동아리 후배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옛날 자료일 뿐인데.

 

작품 내내 눈에 띄는 건 핸드헬드로 촬영된 세피아 톤의 일상이다. 도경이 대학 시절 현진·민우 등과 함께했던 영화 동아리에서 캠코더로 찍은 하루하루, 그리고 같은 캠코더로 찍은 지금의 매일이다. 똑같은 카메라로 찍어 질감도 같은 두 시점이 번갈아 나오기 때문에, 화면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 어렵다. 두 시점이 교차할수록 현진에 관한 기억은 선명해지고, 마침내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 혼자 화면을 보던 도경의 얼굴 숏이 그가 보는 현진의 작품 푸티지로 전환되고, 푸티지가 끝날 때쯤 왼쪽으로 천천히 패닝하면 같은 작품을 동아리 사람들이 함께 시사 중인 과거에 도착한다. 10여 년 전 찍은 뒤 잠들어 있었던 현진의 과거가 이제 찍기 시작한 도경의 현재를 만나, 생동하는 기억으로 살아나는 셈이다.

 

과거와 지금, 도경과 현진을 이은 건 영화라는 일상이다. 작품에서 내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듯, 일상과 영화도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캠코더에 찍힌 그들의 대학 시절은 영화를 찍는 게 곧 일상이다. 푸티지의 상당수는 그들이 찍던 영화의 촬영 비하인드다. 반대로 도경은 자신의 강연을 통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상이다, 사소한 일상들이 모여서 영화가 된다'고 언급한다.

 

이 작품 자체가 그 실천이기도 하다. 현진의 흔적을 좇는다는 줄기가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일상이 있다. 도경은 영화평론가로서 강연을 하고, 엄마의 병실을 찾고, 민우·아린과 함께 바다에 간다. 영화는 그런 도경의 일상을 일부러 길게 보여준다. 강연에 가느라 지하철을 타 자리에 앉고, 열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오고 강연장까지 걷는데, 그 사이 동선을 생략하지 않는다. 그의 걷는 속도에 맞춰 묵묵히 따를 뿐이다. 도경이 현진을 찍은 푸티지를 빠짐없이 돌려보듯, 관객이 도경의 일상을 빼먹지 않고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도경은 현진을, 관객은 도경을 따라간다. 현진의 작품을 찾아내 눈에 담는 건, 도경에겐 현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한때 삶의 모든 것인 양 소중했던 시절의 인연을, 뒤늦게 "연락 한 번 더 해볼 걸" 하고 후회하며 미안해하는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 한편 도경을 좇은 관객이 도착하는 곳은 극장이다. 작품 속에서 도경은 극장에서 수차례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평론가라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지만, 영화를 보는 도경의 얼굴은 특히 편안해 보인다. 반복해서 등장할 정도의 일상인 만큼 극장은 도경과 떼놓을 수 없다.

 

도경이 현진의 옛 작품을 찾으면서 방문하는 극장은 사라지는 단관극장이다. 도경이 광주극장을 찾은 신은 오래된 단관극장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동시에, 사라지는 극장의 일상을 꼼꼼히 담는다. 이미 사라진 극장도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도경이 보는 사진 전시의 배경은 지난 2023년 황망히 철거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다. 고작 4년 임기제 시장이 60년 역사를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극장을 지킨 시민 24명은 시 정부에 고발당했다. 3년 가까운 송사 끝에 전원 무죄가 선고됐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무기력한 분노가 화인처럼 찍혔다.

 

감독은 그때의 무기력함을 토대로 현진이라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을 화면에 새김으로써 영화의 할 일을 만들어 낸다.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현진의 작품을 기어코 찾아내 기억하는 도경처럼,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극장을 일상에서 기억하겠다고 작게나마 약속하는 것 말이다. 더불어 관객에게도 나지막이 권해 보는 게 아닐까. 같이 기억해 주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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