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친절한 프로그래머 5 - 박가언 프로그래머 |
바야흐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하고, 시공을 넘어 반복되는 난제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감독이 창조한 소우주에 경탄하기도 한다. 영화는 결국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인 만큼, 나 그리고 너, 그리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확장되고 조금 더 깊어질 수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나침반을 따라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다정한 시선으로 그려낸 열여덟 개의 세상을 만나보자. |
날카롭고 다정한 시선으로 그린 열여덟 개의 세상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관객상을 휩쓸며 최고의 화제작이 된 다큐멘터리다. 밤새 게임하느라 ‘등짝 스매싱’을 당해 봤는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온라인에서 만나 가슴 설렌 적이 있는가? ‘실친’에게는 드러낼 수 없었던 또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가? 설사 그런 경험이 없더라도, 이 영화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서브스턴스>는 올해 칸영화제를 찾은 영화관계자들이 “그 영화 봤어?” 할 때의 바로 그 영화였다. <사랑과 영혼>(1990)에서 쏟아질 듯한 눈망울로 관객을 울리던 데미 무어는 어느새 환갑을 넘긴 나이에 인생 연기를 펼치며 새로운 대표작을 필모그래피에 추가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리는 결말이 압권이다. |
데미 무어가 여우주연상 감이었다면 <바늘을 든 소녀>는 여우조연상 감의 배우가 우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가 가장 연약할 때 가장 상냥한 모습으로 나타난, 구원자인 줄 알았으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다그마르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편,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에서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레나테 레인스베가 ‘연기 차력쇼’를 펼친다.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하프단 울만 톤델 감독은 스칸디나비아 영화계 최고의 로열 패밀리 (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배우 리브 울만의 손자) 출신이다. |
<킬 더 자키>는 영화를 통해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최근 독특하고 실험적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와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 대표주자인 루이스 오르테가 감독의 신작은 경마 기수가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묘하고 초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편, 아프리카 잠비아라는 낯선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뿔닭이 되는 것에 대하여>는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화두를 던진다. 천적의 출현을 울음소리로 알리는 뿔닭처럼, 영화는 가족의 어두운 비밀을 숨기고 덮기에 급급한 기성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
아프리카의 뙤약볕을 벗어나 북유럽의 서늘한 여름 풍광 속에서 펼쳐지는 <빛이 산산이 부서지면>은 80여분간 눈호강과 귀호강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민한 소녀에게 닥친 예기치 못한 비극을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성장의 성숙과 고통을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또 하나의 성장 영화 <보통의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 형제자매를 둔 어른 아이에게 덧씌워진 책임감과 죄책감에 집중한다. 주인공의 영혼까지 파고들 것처럼 줌인하는 클로즈업 샷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따스한 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차분한 성찰보다는 도파민 폭발하는 성장 영화를 보고 싶다면 <니캡>을 추천한다. 어른들의 간섭과 공권력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 모국어로 랩 음악을 만들다가 저항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과정은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리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직 방황하고 있다면 <사랑일까요>를 주목하자. 중년의 비혼 여성과 게이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오슬로의 리버버스 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 영화에서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설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패기로 뭉친 신인 감독들의 작품은 언제나 흥미롭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소개되는 <토요일, 아빠는 먼 길을 떠났다>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러시아 감독 자카 압드라흐마노바의 데뷔작으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고향을 배경으로 만든 ‘웬수같은’ 가족 영화다. 또 하나의 데뷔작 <폴 & 폴레트>는 영국 출신의 프랑스 감독 제쓰로 메시의 로맨틱 코미디로,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만난 남녀가 죽음에 대한 매혹으로 연결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
첫 번째 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영화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라우리나스 바레이사의 <마른 익사>는 영리한 구성과 현실감 넘치는 스토리로 노련미를 자랑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타오르는 몸의 기억들> 역시 안토넬라 수다사시 푸르니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다큐인 듯 픽션인 듯 전개되는 스토리는 ‘나이 든 여자’가 여전히 다시금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신인답지 않은 신인이라면 <액트 오브 킬링>(2012)과 <침묵의 시선>(2014)으로 이미 국내에 탄탄한 팬층을 보유한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극영화 데뷔작 <디 엔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틸다 스윈튼이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 영화다. |
영화는 가상의 세계를 선사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하베스트>는 언제인지 모를, 이름도 없는 마을에서 펼쳐진 사건을 묘사하지만 현재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우경화 바람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장기화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을 배경으로 한 <회색 벌들>은 평화와 함께 상실하는 인간성을 애도하며, 70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역사를 기록한 아카이브 푸티지 자료를 이용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스웨덴 국영방송이 30여년에 걸쳐 보도한 뉴스 화면으로 제작된 <1958-1989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 어쩌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이미지를 선별하고 편집한 집념에서 묻어나는 절절한 호소는 오늘도 총성이 멈추지 않는 가자지구에 깊은 울림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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