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페라크, 오래된 집 벽면에 30년 넘게 걸려있는 한 남자의 초상화. 가족들은 사진 속 인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오래된 가족사진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부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남자는 말라야 공산당(MCP) 소속 군인이자 1949년 독립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감독의 할아버지였다. 라우 켁 홧 감독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가족사를 파헤치며, 말레이시아 근대의 정치적, 인종적, 지정학적 굴곡을 펼쳐낸다. 2차 세계 대전 중 학생이거나 노동자 신분이었던 이들은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략해오자 이에 저항해 싸우기 위해 말라야 공산당을 조직해 무장 투쟁에 나섰다.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을 기대했던 이들의 기대와 달리 영국은 식민 통치를 이어갔고, 말라야 공산당은 다시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친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냉전의 논리로 얼룩진 말레이시아 현대사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유령처럼 열대 우림을 떠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추방되었거나, 이야기할 권리를 빼앗겼다. 영화는 이 비밀스러운 기억들을 조심스럽게 길어 올려 역사로 복원해낸다. (홍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