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 사건을 말할 때, 당시 중앙정보부장 수행 비서관인 박흥주를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행복의 나라>는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단 16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며 역사에서 빠르게 삭제된 그를 전면화한다. 이선균이 이 인물에서 모티프를 얻은 군인 박태주를 그렸다. 명령과 규칙을 져버리지 않겠다는 군인으로서의 단호한 직업의식, 역사의 죗값을 받겠다는 자성의 죄의식, 끝까지 의연해지고자 하는 인간적 기개까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담담한 이선균의 깊은 울림의 목소리,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가만한 그의 옆얼굴, 법정에서 흔들림조차 없는 꼿꼿한 몸의 자세, 옅은 울음이 섞인 듯 미세하게 떨리는 마지막 순간의 음성까지.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역사의 강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사람, 그 한 사람의 존재감이란 이런 것임을 알겠다. 이선균의 유작이다.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