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한 연인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영화는 꽤 지루해 보인다. 몇 없는 관객 중엔 졸고 있는 사람도 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길고 재미없어 보이는 영화가 끝나갈 때쯤 시작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온 여자와 남자는 말없이 걷는다. 하루가 끝나가는 밤의 도시를 걷고, 걷고 또 걷다가 그렇게 이별한다.
윤지혜 감독의 첫 장편인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는 어느 남녀가 이별한 날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와 헤어진 방식은 이 영화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헤어진 날, 헤어짐 이후의 시간이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작별 인사가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결코 쿨할 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돌아서서 다시 뒤돌아보지 않길 결심했다가도 남자의 뒤를 따라 또다시 걷게 된다. 여자는 밤거리를 헤매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꽤 느린 흐름을 가지고 있기에 영화 속으로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많다. 이 때문에 여자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따라 바뀌는 배경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주인공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자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걷고, 나는 그런 여자를 따라 걷는다. 여자 발 앞에 보드마카가 굴러온다. 보드마카를 집는 순간 여자는 현실에서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길에선 여자가 남자와 함께 보았던 길고 재미없는 영화, <미로 위의 산책>의 촬영이 한창이다. 공교롭게도 여자가 우연히 도착한 그곳의 영화 또한 이별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현실의 사건과 영화의 사건이 겹쳐진다. 밤이라는 시간대 때문에 몽롱함이 더해져 꿈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여자와 영화 속 영화의 여주인공의 만남을 통해 이별의 정서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이제 막 이별한 여자와 여든아홉 번째 이별하는 여주인공은 철골만 남은 폐공장에 도착한다. 공장 벽엔 빛바랜 기억의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긴 산책 끝에 이별의 종착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사랑의 기억을 불에 태운다. 외로운 하루의 끝에서 함께 있는 것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영화 속 담담한 음성의 나레이션과 서정적 배경음악은 영화의 슬프지만 담담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의 정서가 한층 두터워지는 이유는 영화가 현실이 스며드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이별 중일 때 걷던 도시의 일상적인 순간이 영화에 들어올 때, 두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보인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멈춰버린 것처럼 말이다. 또, 후반부에 남자의 집 앞에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엔 해가 비쳤다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반복된다. 이 순간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별의 끝에서 여자가 위로를 받는 듯한 이 장면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윤지혜 감독이 그린 이별 이야기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 강한 이유는 의도한 대로 이야기를 흘려보내면서도 관객과 현실이 들어갈 공간을 넉넉히 마련했기 때문일테다.